장관님, 이런 놈들을 찾으십니까?

이상한 녀석들

세인트루이스 도심 기차역에 어려서부터 말을 더듬었던 그래서 내성적일 수 밖에 없었던 한 10대 아이가 앉아있다. 아이는 복잡하게 얽힌 기찻길을 사고한번 없이 정교하게 지나가는 기차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비디오로 찍어댄다.  그에겐 기차, 택시와 같은 교통수단들이 지점 A에서 지점 B로 정확하게 이동하는 그 과정이 참으로 신비하다. 호기심많은 이 아이는 또한 경찰과 앰뷸런스의 비상 라디오 채널에 무선 주파수를  맞추고 거기서 들려오는 “짹짹” 대는 듯한 짧고 강렬한 메시지들에 매료되어 있다. 그는 복잡한 교통 지도와 짦은 메시지로 표현되는 이 도심 전체를 재현해보고 싶었다. 그가 트위터를 만든 Jack Dorsey 다 [1].

dorsey

사진 1: 잘생겼다! Jack Dorsey

뉴욕주에 어려서부터 참 코딩을 좋아한 녀석이 있었다. 그는 갓 12살 되는 나이에 아버지의 치과 사무실과 집을 연결하는 메시징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아래는 그가 만든 홈페이지인데, 저 가운데 떡하니 박힌 공룡 눈깔은 90년대 너드의 풍모를 제대로 풍긴다.

mark zuckerberg

사진 2: 공룡 눈깔 홈페이지                                              사진 3: The Web

그런데 그중 “The web” 이라는 링크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 그림과 같은 사람과 사람이 연결된 복잡한 그래프가 나온다.  웹의 정의는 HTML 문서와 문서가 링크되는 것인데,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그런 웹이라니…? 이것은 페이스북의  Mark Zuckerberg가 고1때 만든 홈페이지다 [2]. 짧은 스토리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어려서부터 프로그래밍을 참 좋아했고 잘했다는 것. 그리고,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이상한 것에 꽃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자. 우리 동네에 어떤 형 하나가 있는데 말도 더듬고 내성적이다.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전철역에 나가서는 기차가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항상 찍는다.  무전기를 꺼내 경찰의 신호를 도청하며 듣고, 복잡한 교통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웃는다.  난 그 사람을 이렇게 부를거다: “동네 바보형”.

초딩? 코딩?

Jack Dorsey나  Mark Zuckerberg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다름아닌 창조경제의 떠오르는 키워드 “초딩 코딩”을 다루고 싶어서다. 우선 나는 코딩을 일찍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 동감한다. 거의 모든 성공적인 해커들이 어려서부터 코딩했으니까. 아래 비디오에 나오는 강호의 고수들이 거짓말을 할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마음속 깊은곳부터 “그건 아닌데…” 라고 반항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높으신 장,차관님들의 제한된 생각 때문인듯 싶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능숙하게 컴퓨터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 교육을 진행하면서 창조경제에 적합한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전략이다 [3].”

“윤 내정자는 ‘우리 아이들이 ICT로 발달한 결과물(게임, 인터넷)만 가지고 노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게임 중독도 나오고 인터넷 중독도 나오는 것’이라면서 ‘소프트웨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에 기반해 아이들의 놀라운 호기심과 능력을 직접 만들고 개발하는 쪽으로 돌릴 수 있다면… [4].”

창조형 인재를 “키워내겠다”는 의지는 고마운데 그 과정에서 혹시 저기 노량진역에 앉아 기차들을 비디오로 찍는, 말 더듬는 그런 아이 하나도 창조형 인재로 인정해 줄 수 있을까? 혹시 그런 아이들을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와 같은 비 창조형으로 낙인찍진 않을까?

장관님, 저 코딩은 좀 합니다

이 동네에 만 34세에 코딩을 꽤 하는 사람이 있다. 실리콘밸리의 잘 알려진 스타트업에서 IaaS 클라우드를 만드는데 10개 넘는 언어중 아무거나 골라잡아 코딩할 수 있고, 리눅스나 윈도우즈든 가리지 않는다. 뭐 버는 것도 쏠쏠찮다. 그래서 뻔뻔하게 “장관님 저 코딩은 좀 합니다” 라고 이야기 할만한 그 사람은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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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겐 마음 한구석 늘 빈공간이 하나 있다. 나도 무언가 내것을 창조해보고 싶다. 내가 시작하는 스타트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10년 넘게 지겹게 날 쫓아왔다. 코딩 실력은 부족하지 않다. 20대만큼 잠 적게 자며 코딩할 수 있는 자신도 있고 체력도 있다. 늘 하는 이런 고민을 하던중 얼마전 새벽 갑자기 스치는 생각에 놀라 잠에서 깼다.

내게는 비젼(Vision) 이 없구나.

아니 사실은 예전 블로그에서 이야기 했듯  미국의 너드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코딩하는 그 비젼은 있었고 이루었다 [링크]. 하지만 넘치는 코딩 능력과 열정을 쏟아부어 이루고 싶은 그림, 오랜 시간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 내게는 없었다. 붓도 물감도 모두 준비되었지만 꼭 그려내야 할 나만의 세계관이 없었다.

SW 스타트업 – 집착(Obsession) 과 비젼

Jack Dorsey가 어린시절 빠져있었던 것은 도심의 복잡한길을 정교하게 통과하는 기차, 택시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짹짹”대는 소음들이었다. 그 집착(Obsession)이 코딩을 만난 결과물이 트위터다.  Mark Zuckerberg는 문서와 문서가 연결되는 웹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웹을 생각했다. 고1때 그런 웹을 생성하는  Java프로그램을 홈페이지에 올렸고, 훗날 하버드 기숙사에서는 Facemash라는 해킹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집착을 지속했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스타트업 Pinterest를 시작한 Ben Silbermann은 어려서부터 우표, 돌, 곤충을 수집했고 자신이 수집한 것들이 자기를 표현한다고 믿었다 [5]. 최근 가장 크게 주목받은 Tumblr의 David Karp는 고등학교를 중퇴해 처음 일한곳에서 블로깅 사이트를 만들다가, “‘this blogging thing is too hard”라 선언하며 사용자 친화적인 블로그에 집착했다. 어려서부터 지속되는 바보같은 집착이 코드를 만날때, 집착은 비전이 되고 코드는 전세계에 그림을 그린다.

pinterest

사진 4: Pinterest – 온라인 곤충 수집

우리 아이들

창조경제의 핵심이 SW라고 믿는다면, 창업자들의 독특한 세계관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야 한다. 지금 우리 눈에 바보처럼, 엉뚱한 짓거리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집착을 과연 우리는 용납할 수 있을까? 나는 30대 중반에서야 깨달은 이 SW의 진실이 참 억울하다. 80-90년대를 지나며 그런 바보짓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부모님과 한국 학교, 사회가 참 야속하다. ‘만일 그때 나도 Jack처럼 비디오 카메라 들고 전철역에 앉아 있었더라면….’. 지금도 분명 우리 가운데 Jack같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역전, 시장통 어딘가에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고 있을거다. 그 아이들에게 코드는 가르치자..그리고 그 집착은 눈감아주자… 

— 박상민  https://twitter.com/sm_park

[1] http://www.vanityfair.com/business/features/2011/04/jack-dorsey-201104
[2] http://www.huffingtonpost.co.uk/2013/04/04/mark-zuckerbergs-first-website-angelfire-screenshots_n_3012148.html
[3] http://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serial=746979&g_menu=020400&mains=News
[4] http://media.daum.net/digital/others/newsview?newsid=20130324164805713
[5] http://money.cnn.com/gallery/magazines/fortune/2012/10/11/40-under-40.fortune/18.html

장관님, 코딩은 좀 하십니까?

창조의 추억

창조경제부가 위기다. 큰 누님 등극후 언론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그들이 “진상의 거인” 윤창중에 의해 아웃오브안중이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쩌면 언론의 관심에서 잠시 벗어난 지금 어디 다같이 MT라도 가셔서 SW 공부, 코딩 공부라도 다시 하는 일은 당연히 상상할 수 없겠다. 창조경제부의 수장 “최문기” 장관님.. 처음 이름을 들었을때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높은분 내가 알리가 없는데… 얼마전 그의 프로필을 훑어 보다가 내겐 잊을수 없는 단어를 발견했다.

2001.10 : 그리드포럼코리아 의장”, “ICU 그리드미들웨어연구센터 최문기 소장”

아 그분은 내가 10년을 연구했던 그리드 컴퓨팅의 한국내 최고 책임자셨구나. 그래서 내가 그 이름이 친숙했구나. 이거 참 너무 반가워서 블로그를 안할 수가 없다. 기대하시라!

그리드 컴퓨팅. 10년전 SW 최고 핫 이슈! 이곳저곳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연동해 하나의 컴퓨터처럼 공유한다는게 비전이었고, 미국에선 제 2의 인터넷이라 불리며 정부에서 몇천억을 학교에 뿌려주던 그런 프로젝이다. 미국 따라하기 좋아하는 우리 역시 참여정부 출범직후 수백억을 학교에 하사한다. 창조의 역군 최문기님이 그 프로젝의 리더였다.

때는 2002년, 석사 1학년 “꼬꼬마”였던 나는 우연히 그리드 컴퓨팅에 발을 들였다. 수많은 논문을 읽으며, 나 역시 서양것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진짜” 그리드 시스템 — 여러개의 학교, 연구소의 컴퓨터가 연결되어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 을 만들고 싶었다. 상상하니 신이났고, 또 하면 할수 있을것 같았다 (이게 꼬꼬마의 문제다). 두가지가 관건이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 전국의 클러스터 컴퓨터를 모으는 것.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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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막 학부 졸업한 꼬꼬마도 맘먹으니까 되는구나 그때 알았다. 몇달간 밤새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국의 몇개 학교 대학원생에게 클러스터를 사용해도 될지 이메일을 돌렸다. 과부사정 홀애비가 잘안다고 그들은 너그러웠고, 몇몇은 root 패스워드를 가르쳐주는 과잉친절까지 보였다. ‘이렇게 진짜 그리드 테스트베드가 생기는구나’, 그게 참 신이났다. 당시 채팅으로 열정을 나누던 타학교 학생들을 신촌까지 찾아가 만나고, 맥주마시며 신나게 연구 이야기를 하던 기억이 아련하다. 결과적으로 그 당시 꽤 잘나가던 국제 학회에 논문을 집어넣고 채택되는 행운을 얻는다. 사실 아이디어는 구닥다리였지만 아시아에서 테스트베드를 만들고, 실제 그리드를 만들어 실험했다는 그 사실이 서양것들에겐 신기했다. 자랑같지만 실제 한국에서 그리드를 만들어서 논문 채택된 것은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연구하던 2년내내 그리드의 변방에 머물렀다. 내 연구결과를 가지고 교수님이 제안서를 썼고, 돈 얻으러 발표 다녀오신후 한마디: “어 그거 안됐어…거기 될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다 알더라고…”. 그리드 포럼 코리아, 창조의 역군께서 의장으로 계시던 그곳은 이미 네트웍이 단단해서 나같은 변방 학교 꼬꼬마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내가 논문을 어디에 냈건, 어설프지만 테스트베드를 만들었건 그게 큰 상관은 없었다. 그 분들은 이미 뛰어난 플랜을 가지고 계신 한국에서(만) 알아주던 전문가 들이니까. 2년간 그래서 좀 외롭게 연구하다가 미국에 나왔다.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클라우드 회사에서 같은것을 만들고 있고.

그럼 정부의 돈을 다 빨아간 “그리드 포럼 코리아” 이 분들은 몇년간 무슨 일을 하셨을까? 처음엔 제법 서양것들처럼 조직을 만들었다. 포럼, 워킹 그룹, 리서치 그룹 등등. 회의도 많이 했다. 그리고 그분들은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비전을 담은 그림, 연간 계획도, 기술스택, 담당기관 연락처등등.. 몇년간 계획세우고, 그림그리고 발표하고…

그렇게 끝났다. 몇년 후 이젠 “유비쿼터스”가 대세라고 정부가 방향을 트니 예산이 사라졌고, 포럼의 교수들, 기관들 다 그쪽으로 돌아섰다. 나랏님이, 그 돈받는 교수님이 이제 유비쿼터스 하라시니 대학원생들은 별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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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간 수백억 세금을 들인 사업에 남은 건 파워포인트와 그림들 뿐이다. 코드도 남지 않고, 사람도 남지 않았다. 허무한 그림만 여러개 구글 이미지 캐쉬에 남아있다. 아래는 당시 최문기 장관의 인터뷰 기사다.

“한때 ETRI에서 연구열정을 불사르기도 했던 최 소장은 “오는 2010년께는 지금보다 1만배 빠른 인터넷이 일상생활에 활용될 전망”이라며 “미들웨어 연구는 향후 예상되는 인터넷 트래픽을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산·학·연 컨소시엄을 활용한 공동연구로 미들웨어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석박사급 인력을 향후 4년간 50명 정도 배출할 계획이다.”

묻고 싶다. 약속했던 미들웨어 분야 코드는 어딨습니까? 전문인력 50명? 난 그동안 한 사람도 못 보았는뎁쇼?

관료의 나라

우리는 관료의 나라다. 최문기 장관도, “기가 코리아”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그 아래 윤종록 차관도 모두 한때 엔지니어였다. 언론은 그들이 한때 우리처럼 코딩하던, 그래서 현장감있는  새시대의 일꾼이라 칭찬하지만, 내가 경험한 그들은 모두 “관료”일뿐이다. 돈이 있는 곳에, 인기가 있는 곳은 제일 먼저 달려가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 팝송을 번역해 부르는 것처럼 미국의 인기 기술, 그 호사스런 미래상을 소개하는 사람들. 파워포인트에 미래상을 그려주면, 언젠가 진짜 엔지니어, 해커들이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 그림만 그려대는 사람들, 그들은 관료다.

Licklider와 Arpanet

J._C._R._Licklider

J.C.R. Licklider (http://en.wikipedia.org/wiki/J._C._R._Licklider). 20세기를 살았던 이상한 이력의 소유자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하버드와 MIT에서 교수를 하다가 60년대 처음 컴퓨터를 만난다. 그리고 쉴세없이 빠져들어가 심리학자가 코딩을 시작한다.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기계어를 직접 넣어야하는 어려운 코딩말이다. 컴퓨터에서 미래를 본 그는 교수 생활을 접고 BBN이라는 컨설팅 회사에 들어간다. 음향전문회사인 BBN을 설득해 비지니스에 아무 상관없는 컴퓨터를 구입하고, 몇명의 해커를 고용해 컴퓨터 부서를 만든다. 그는 곧 미 국방부의 연구 지원 프로그램 ARPA에 들어가 스스로 “공무원”이 된다. 그리고 두개의 프로젝을 시작한다. 프로젝과 시작 동기는 이렇다.

  • MIT의 프로젝트 MAC: 그는 코딩을 하던중 비싸고 큰 컴퓨터를 혼자만 이용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임을 깨닫는다. 한대의 컴퓨터에 여러명이 접속해서 공유할때 컴퓨터의 진짜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믿었다. 프로젝트 MAC은 처음으로 time sharing을 구현했다.
  • ARPANet: ARPA의 사무실에는 여러개의 국방부소속 컴퓨터 터미널이 놓여있다. 여러개의 모니터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불편해, 컴퓨터들이 서로 네트웍에 연결되면 얼마나 편할까 상상한다. 그리고 대학들을 네트웍으로 연결하는 프로젝을 시작한다.

프로젝트 MAC에서는 훗날 유닉스와, C 언어, 그리고 넓게 봐서는 리눅스가 나왔다. ARPANET은 네개의 미국 대학 컴퓨터를 연결해 인터넷의 전신 패킷네트웍을 만들었고, 그 핵심기술인 IMP(라우터)는 BBN에서 Licklider가 심어놓은 해커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TCP/IP의 아버지 Vint Cerf가 그의 프로젝 펀드로 연구하던 꼬꼬마 대학원생이다.

코딩하던 공무원은 Licklider 혼자가 아니다. 어느날  ARPA의 디렉터와 그 아래 ARPANET 책임자 사이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

ARPA 디렉터: “너희 ARPANET에서 만든 이메일을 쓰니까 정말 편하더라. 근데 난 이메일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거 관리하는게 정말 불편해…ㅠㅠ”
며칠후 ARPANET 디렉터: “내가 이메일 관리 코드를 짜봤어 한번 써봐.”

이렇게 세계 최초의 이메일 관리 프로그램을 고위 공무원이 만들었다. 그리고 그 코드는 곧 ARPANET 유저사이에 사랑받는 프로그램이 된다.

마무리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부에서 외치는 구호에 학교들이 화답한다: “그리드”, “유비쿼터스”, “월드클래스 유니버시티”, 이제는 “창조경제”. 우리에게 더이상 큰 그림 그리는 사람은 필요 없다. 언론에 떠들어댄 몇조원 경제 효과, 수백명의 전문가 양성, 이제는 주워남을 수 없는 그 약속들이 부끄럽지는 않은가? “장관님, 차관님 코딩을 좀 하십니까? ” 물으면 아마 속으로 ‘내가 이 나이에, 이 자리에 그짓을 왜..?’ 묻겠지..하지만 우리에겐 해커의 심성을 지닌 사람, 즉 문제가 왜 문제인지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절실하다. 문제를 정말 사랑하고, 그 본질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창조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한때는 나와같은 엔지니어, 해커의 길을 걷던 “동지” 높은분들께 이렇게 묻고싶다.

brother

“어이 부라더, 너 만에 하나 내가 C코드 짜라하면 그거 감당할 수 있긋냐?”

대답을 제대로 못할 시 연변 너드들이 찾아갈지도 모른다.

yeonbyon

— 박상민 https://twitter.com/sm_park

우리의 강함은.

흔히 해커들은 어려서부터 프로그래밍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나는 아니다. 인문학부로 막 대학에 들어간 첫해는 국사, 국문, 영문과마다 MT를 따라다니며 그때까지 남아있었던 인문학의 끝자락 낭만을 구경했다. 제 멋대로 머리기르던 “스티븐 시발”형들이 길목마다 가득했다. 절친 형이 컴퓨터를 너무 사랑해 밤마다 프로그래밍 하던 모습이 사실 그것보다 더 좋아보였다. 그래서 컴퓨터과에 전과를 했다.

고등학교부터 인문학돌이였던 내가 그렇게 첫 프로그래밍 수업을 들었다 (참고로 나는 수능 언어영역에서는 늘 99.9% 에 들었고, 수리 영역에서는 50%를 간신히 턱걸이했다). C언어를 하는 그 수업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처음이라 어렵긴 하구나…”.  두번째 수업을 마치고 “확실히 이과 애들은 다른가보다. 생긴것들 봐봐….”.  막 전과한터라 도움 받을 사람도 없이 결국은 학기말까지 이해 안되는 코딩…어떻게든 버텼고 랩실에서 기말 시험을 보았다.  시험 내용은 아마도 Sorting 알고리즘 하나를 구현하는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컴파일이 되지 않았다.’…

시험 마치기까지 데이터 정렬을 하기는 커녕 프로그램이 컴파일조차 안됐다. 조교가 결과값을 확인하러 왔을때 결국 컴파일 에러가 가득한 모니터를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 C언어 수업 결국 C를 받았다. 그날 부끄러워서 조교형 얼굴도 못쳐다보며 컴퓨터실을 나오고 마음속에 무언가 감정이 솟구쳤다.

학부 3학년, 때마침 한국은 벤처의 광풍이 몰아쳤다. 앞에 소개한 형이 한 벤처 회사의 CTO가 되었고, 그동안 간신히 덜덜덜 거리며 프로그램 수업듣던 내게 일을 제의했다. 일년간 정말 열심히 코딩했다. 낮에는 학교를 다니고 밤에는 코딩하다가 회사의 아주 조그만 서버실 뒤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너무 생각을 많이해 때로는 꿈에서 알고리즘을 얻기도 했다. 아침에 회사 화장실에서 대충 머리를 감고 나오자면 청소부 아줌마가 늘 ‘저건 뭐하는 자식이야?…’ 이런 얼굴로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이제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당시 비지니스 모델 찾는다고 마음만 바쁘던 회사는 처음으로 (대기업!) 나우누리에서 프로젝을 수주했다. 그런데 사실 개발 경험이 거의 없던 회사였던지라 진도가 영 부진했다. 간신히 apache, tomcat 셋업하고 자바 서블릿 튜토리얼 보아가며 ‘달달달’ 겨우 코딩하던 꼬꼬마였다. ‘갑’ 나우누리는 진도가 안 나오는 우리를 전화로 닥달하다가 결국 개발자 보내라고 요구했다. 아…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그랬는지..이제 겨우 학부 3학년 꼬꼬마가 그곳에 갔다. 그래도 ‘갑’이 부르시니 좋은거 입고 가야한다고…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은갈치 정장을 입고 갔다.

개발자들 수두룩하고 터미널이 가득한 커다란 방에 은갈치가 던져졌다. 그리고 데모를 해야 하니 준비를 하란다. 윈도우즈가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던 나는 리눅스를 배운지 이제 갓 몇주. “ls” “cd” “mkdir”..이런 단 몇개의 커맨드라인으로 무장한 나를 유닉스 터미널에 앉혀놓고 다시 올테니 데모를 준비해 놓으란다. 정장을 하고 앉은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렇게 갑의 회사 터미널에 한시간동안 ls, cd만 쳐대고 있었다. 결국 그날 갑의 팀장에게 정말 무섭게 혼나며 세상맛을 보았다. 속으로는

‘저 이제 학부 3학년 어린이예요..리눅스 지난주에 배웠어요’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혼나는게 맞았다. ‘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혼날수 있구나’ 그날 알았다. 그렇게 그곳 개발실을 나오며 마음속에서 무언가 또 솟구쳤다.

몇년후, 이전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내용이 계기가 되어 유학을 나왔다.(https://sangminpark.wordpress.com/2011/09/15/%EB%B9%84%EC%A0%84-%EB%88%88%EC%9C%BC%EB%A1%9C-%EB%B3%B4%EB%8A%94-%ED%96%89%EC%9C%84/) 비록 학부 학점은 요즘 류현진 방어율 비슷하지만 코딩은 이제 제법 자신있었다. 게다가 다른 신입생들과 다르게 나는 이미 여러편 논문을 쓴 경험이 있었다. 미국에서도 잘 할것 같았다. 두학기 지난후 퀄 시험이라는 박사자격시험을 보았다. 안될것같은 학생은 미리 걸러내는 시험이다. 열심히 준비했다. 아직 20대 초반 어린 아내가 싸준 도시락 도서관에서 같이 먹으며 공부했다. 아 이렇게 많이 배우는구나 생각했다. 시험을 치뤘다 그리고..

‘나는 한 문제도 맞추지를 못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무어라고 답을 적어낸 문제가 거의 없었다. 빈 종이를 내고 나오며 혹 교수님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부끄러웠다. 집에 돌아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맞아준 아내를 방에서 나가게 하고 그냥 침대에 누웠다. 살면서 처음으로 ‘정말 안될것 같다’ 라는 패배감이 가득했다. 아마 한 문제만 제대로 답을 써봤어도 그렇진 않았을텐데…간신히 잠을 청하고 저녁즈음 일어나며 드는 어떤 감정이 있었다.

돌아보면 세가지 일을 겪은후 마음속을 가득 채운 그것은 “분함”이었다. C학점을 받은것도, ‘갑’에게 혼났던 것도, 빈 답안지를 냈던 것도 모두 내 모자람때문이었는데 나는 왜 그게 그렇게 분하고 원통했는지 모른다. “분함”이란 풀어 쓰자면, “두고봐라 내가 지금은 이래도 앞으로는 달라질 거다” 라는 일종의 선언이다. 그렇게 처음 분함을 품은지 10년이 좀 더 지났다. C코드 컴파일도 못시키던 꼬꼬마가 지금은10개 정도 언어로 몇십만 라인 코드를 짜고 있다. 리눅스를 몰라 ls, cd만 땀흘리며 톡톡댔었는데 지금은 ubuntu, redhat 사람들과 같이 일을한다. 정말로 안될줄 알았던 퀄시험도 그냥 책을 통째로 외우는 비장함으로 마쳤다.

이렇게 개인적 일화를 길게 적어간 이유는 “다 잘되었노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이 “분함”이 한국인이 가진 가장 강한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번 블로그를 올린후 누군가 한국인으로서의 강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는 미국과 같은 잉여 문화도 없고, 거대한 오픈소스 커뮤니티도 없다. SW를 제대로 만들어본 경험도 없다. 무엇일까…나름 고민을 하다가 결국 다다른것은 우리에겐 이 “분함”과 같은 강한 감정의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인 동료들과 일하며 그들의 너드스런, 잉여스런 집착에 감탄하고, 정말 화려한 코딩 실력에 많이 감동할때가 많다. 하지만 한국인 동료들만큼 자신의 코드에 감정적으로 접착(attach)되는 사람은 별로 못 보았다. 때로 우리는 툴툴대긴 하지만, 주말에도 밤에도 코딩할만큼 자신의 일에 감정적으로 몰입한다. 혹 누군가 내 코드가 영 별로라고 말하면 미국 사람들은 “입닫고 저리 가” 하겠지만, 한국 사람은 그말이 분해서 디버그하고 또 디버그한다.

우리가 가진 이 강한 감정의 힘. 이것이 어떻게 일상의 행복, 잉여의 문화와 결합할 수 있을까?…추상적인 질문이지만 개인적으론 여기에 SW의 해결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 한국인 고유의 감정의 힘과 잉여스러움의 조화…언젠가 멋지게 어우러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https://twitter.com/sm_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