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둘째 아이를 낳고 (내가 아니고 부인님이) 그 녀석 돌보는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초저녁 새우잠을 잔적이 있다. 꿈을 꾸었다. 이유는 알수 없었는데 10여년전 대학생 시절 매일처럼 지나다니던 수원역 거리가 마치 영화 필름 돌려보듯이 너무 생생하게 나타났다. 학교버스에서 내려 신호등 지나면 보이는 수원역전과 그 주변을 가득 매운 노점상, 그리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한참동안 잊고 있었던 그 풍경을 그대로 돌려보니 꼭 예전 발라드 듣고 난 기분 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제일 생생하고 한편으로 왠지 돌아갈수 없을것 같은 아련함까지 느낀건 다름아닌 길거리 노점상들의 오뎅 냄새를 꿈속에서 맡았기 때문이다. 웃기지만, 정말 그 냄새들이 꿈속에서 살아나니 13년전 그때의 분위기 모두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꼭 그 꿈 뿐만이 아니다. 종종 낯선 장소에서 우연히 맡은 어떤 향기 때문에 나는 한참을 잊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때가 많았다. 아마도 후각은 무의식속 과거를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감각 기관인가 보다.
후각이 과거라면, 시각은 미래를 만드는 감각기관이라 생각한다. 비전(vision)의 사전적 해석을 보면:
- 눈으로 보는 행위
- 앞으로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
약 9년전쯤에 나는 한국에서 컴퓨터과 대학원을 다녔다 (아주대학교). 학부시절 벤처한다고 밤을 세우고 살았던 것 그리고 인문학과에서 컴퓨터과로 전과를 한 배경때문에 학부 학점이 심히 안 좋았다. 수학등 모든 기초과학 과목에서 B를 맞아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흔히 학부때 다른 잉여짓에 몰두한 나머지 학점을 소홀히 했다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나름 열심히 공부해도 안됐으니 안 똑똑해서 그런거라고 고백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졸업후 나를 받아주는건 자대 대학원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부의 눈먼돈 (BK21) 지원을 받아 해외 학회를 가게됐다. 영국에서 열리는 오픈 그리드(GRID) 포럼이라는 곳인데 나 포함해서 네명 정도 같은 연구실에서 동행했다. 너무 예쁜 관광지 에딘버러에서 열리는 학회여서 나와 동기들 모두 신났던걸로 기억난다. 첫날 등록하러 학회 장소로 향하는데, 그 당시 그리드는 지금의 클라우드와 같은 유망한 기술로 소문나 이미 건물주변이 사람들로 북적북적 했다. 우리가 관광하느라 늦게 도착해서 안에서는 이미 IBM같은 거대 기업의 중역들이 키노트를 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넓은 홀을 지나가는데, 청바지와 컨퍼런스 티셔츠로 후줄근하게 입고 바닥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뭘하나 살펴보니 그 사람들은 무선랜으로 터미널을 접속해 프로그래밍 하고 있었다. 2002년 그 당시 우리나라엔 무선랜이 막 보급되는 시점이었는데, 선이 없다는게 그렇게 자유로운건지 그때 알았다. 그 사람들은 안에서 하는 높은분들의 키노트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로지 검은 스크린에 떠오르는 하얀 글씨들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거기서 난 나를 봤다. 그때 눈으로 목격한, 자유분방한 차림에 오로지 코딩에만 집중하는 그 모습이 왜 그리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나와 함께 간 동기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는데, 나는 그 모습이 혹 나의 모습이 된다면 하는 상상에 몹시 설렜다. 숙소에 돌아가서도 관광 보다는 그 풍경이 떠올라 괜히 터미널을 띄워넣고 “ls; cd; vi”를 반복했던 것 같다. 학교로 돌아와 에딘버러에서 본 그 사람들이 가는 학회에 나도 한번 논문을 내보자라는, 석사1년차로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품었다. 교수님은 “안될텐데 거기는…”, 만류 하셨지만, 고집을 부려 두달 부지런히 일했고 논문을 제출했다. 다시 두달후에 논문이 accept됐다는 이메일을 받았을때 아마 그때가 태어나 처음으로 성취감을 느꼈던때 였던것 같다. 그리고 그 논문덕에 구원투수 방어율같던 학점을 극복하고 유학을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9년전 눈으로 봤던 그 모습으로 살고 있다. 청바지에 샌달신고 (솔직히 흰양말은 안신는다) 출근해 그때 봤던 그사람들 사이에서 코딩하고 있다 (실제로 지금 회사 동료들이 에딘버러 그곳에 있었다). 아마 그때 그 모습을 못보았다면 지금 난 다른 삶을 살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솔직히 지금 모습이 그렇게 자랑스러워서 글을 쓰는건 아니다. 동기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궁핍하다. 그냥 눈으로 찍어놓은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 구현된 것, 즉 비전의 사전적 의미가 현실에도 적용되는게 신기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고민은 10년후에 구현할 내 모습이다. 지금 스냅샷을 찍고 가슴에 담아야 할 생생한 풍경, 비전은 무엇일까? 계속 주변 사람들과 현상을 관찰하는 습관은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영웅 — 최고로 가치있는 삶을 사는 사람 — 을 가까이에 두고 그 모습을 찍고 싶다.
저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transistor level에서 전자회로 설계하는 엔지니어인데 국내에서 박사과정 중입니다.
클리앙에서 상민님을 알게 되어 RSS 구독해서 열심히 읽고 있는데
요즘 세상이 온통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돌아가서 걱정이 많네요.
우리나라의 우수한 엔지니어들이 비전을 갖고 열심히 해서 개인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제가 잘 몰르지만 분명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에도 소프트웨어 비슷한 그런 재미나 흥분이 있을것 같네요. 소프트웨어 세상이 이루어져도 하드웨어의 영향은 줄어들거나 하진 않겠죠. together 더 큰 마켓을 만들어갈거라 믿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떤계기되어서 이쪽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저도 그런큰 계기가 있었다면 한번의 포기는 없었을것을…..새삼 옛날생각나네요..잘읽고있습니다
에든버러 좋죠. 아.. 그리고 현실로 이뤄낸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이공계분이 이런 필력을 가지고 있다는게 정말 경의롭다는 글을 보고 이곳에 들르게 된 후 틈만 나면 오고있는 한 학생입니다.
좀 있으면 시스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학부출신 초년생에겐 다소 과분한 직함을 달게되는데요, 이번 글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게 된 것 같아 감사하다는 글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포스팅 해주세요~
아 그리고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요
미국에서의 삶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비교해서 의료보험과 언어적인 것을 빼고 또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나요?
워낙에 달라서 어떻게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짧게 요약하면 한국은 익사이팅한 지옥이고 미국은 지루한 천국 이라고 하더라고요..ㅋㅋ 그만큼 여유가 있는대신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좀 느슨한 편이고 사회 변화가 느리죠. 사람에 따라서 분주하고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면 미국보단 한국이 더 좋을수도 있고요. IT 일의 강도 면에서는 여기가 좀 덜 한것 같고요 그리고 일단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는건 전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데드라인이 밀려있어도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데드라인이 밀려있어도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혹시 미국내 모든 직장상사의 생각도 이런가요?? 그렇다면 정말 천국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겠내요.
일반적으로 그런 편입니다. 그리고 결혼 안한 총각들이 보통 일을 더 많이 하는것 같습니다. 저처럼 애들 있는 집은 야근이나 그런거 전혀 없는데 그 친구들은 자발적으로 종종 하거든요..,사실 집에가도 할일이 없으니 이해가 가긴 합니다. ^_^. 자기들 맘 내켜서 하는 사람들은 밤에도 하고 주말에도 코딩하긴 하지만 전혀 강요는 없습니다..
와! 저도 10년 후를 그리면 가슴이 뛰는 일이 있어요! ㅎㅎ
멋지네요!
와우, 글을 잘 쓰는 이유가 있었군요…훌륭한 필력이십니다…부럽습니다.ㅎㅎ
좋은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멋지시네요. 인문학부 출신이라서 그런지 필력이 좋아요. ㅋㅋ
그닥 좋은 필력이라고는 ㅠㅠ 그냥 요 몇주간 계속 쓰다보니까 은근히 글쓰기 재미를 느끼게 되네요…
저는 비전공자로 좋아서 프로그래밍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한 때로부터 어언 11년째가 되는군요..
당시 10년 후에는 Master라는 칭호를 들으리라..라고 결심을 했는데(당시 마스터 키튼이라는 만화책을 읽었던 영향으로…ㅋ), 10년이 지난 지금 Master는 단지 석사학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현재 위치를 보니 영혼을 읽은 직장인 중 하나인 ‘아무나 개발자’가 되어 있습니다..ㅡㅛㅡ;;;
계획은 늘 틀어지기 마련이지만….최근 다시 다음 10년을 고민하고 그에 대한 준비중입니다…
10년 뒤의 나는 어떤 아무나가 되어있을지…
20년 뒤의 나는 어떤 아무나가 되어있을지…
…..
최근 글을 재밌게 보다가 제가 고민한 부분과 유사한 것 같아 댓글 남깁니다.
늘 좋은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저도 마스터키튼 재밌게 봤던 기억 나네요..ㅎㅎ
저도 뭘 이루었다는 기쁨 보다는 앞으로 뭘 그려야하나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__^
저도 한때 어려서 dir 만 쳤던 경험이 있죠. 그리고 지금은 정체 불명이 되었고요. 앞으로만 문제라고 생각 했는데 앞으로가 궁금해 지네요.
아.. 지금 일본의 한 대학원 연구실입니다. 뭔가 헤머로 맞은 듯한 기분이네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생각만해도 설레이는 꿈이 있습니다!
10년 후에 이 댓글을 봤을 때, 저도 꿈의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상민 님, 글 감사합니다. 더욱 꿈을 그리고 스스로를 갈고 닦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댓글들도 선한 마음으로 읽게 됩니다. 님의 글들을 빠짐없이 읽고 나서 다른 곳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른 세상에 대한 영감이 파동쳐옵니다. 님의 이메알 주소를 알 수 있다면 한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습니다.
smpark.uva@gmail.com 입니다..
뭔가 뭉클한게 가슴으로 올라옵니다.
비젼이라는 것을 커다란 무엇인가로 여기다가 님의 글을 보고 그 개념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글 감사합니다.
그래픽, 네트웍,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래밍 등 잡다한 경험뒤에
개발자로의 길을 시작하면서 다짐 했던것이
외국 처럼 백발이 되어도 개발자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개발자가 되는것이 었습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그런 문화는 멀었다는것을 알고는
해외쪽으로 눈을 돌려 보려했으나 마음만 있고 실천은 못하고 있네요.
박상민님 처럼 설레이는 꿈이 갖고 시작하진 않았지만
10년 넘게 개발하면서 작은 꿈은
이제 5살인 아들이 커서 훌륭한 개발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우리나라에서 지금 처럼 개발자가 천대 받지 않고
1등 신랑감 후보가 되도록
조금씩 조금씩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항상 솔직담백한 글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요즘 고민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살기좋은 프로그래머 세상이 오게하는데 일조할까 입니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치우니까 좋은 날이 곧 오리라고 믿습니다..ㅎㅎ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글 첫머리에 수원의 오뎅집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그 때 생각이 나네요. 불과 몇 달전 일이지만 회사에서 회식을 마치고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를 기다리며 오뎅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나네요.
만약에 10년 전에 그 모습을 보시지 못했다면 저희 회사(S사) 선배님이 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도 멋지게 사시는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
클리앙을 통해 알게되어 rss로 등록해놓고 있습니다.
좋은 글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하실 것 같은데 (전 97학번) 그래서 더 정감도 가고, 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상민님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그 쪽 세계도 참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건강하시고,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왠지 민서아빠님 닉이 굉장히 낯익은데요. 저도 클리앙을 2002년부터 들락날락했거든요…저보다 한 학번 선배시네요 ^_^
하고싶은 이야기가 종종 있을때 블로그에 주절주절 하려고요..민서아빠님도 좋은 날들 되세요!
여기는 중국-상해입니다.
한국에서 13년동안 개발+DBA로 살다가 소위 ‘비젼’을 보고 여기로 왔습니다.지금은 작은 개발조직을 이끄는 대장놀이를 하고있고 ‘클라우드’ 테마를 타고 구글링에 의해서 이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검정바탕,흰글씨의 터미널 화면을 동경하던 1인이었기에 감회가 새롭고 제 자신도 새롭게 시작하는 위치에 있기에 여기 중국에서의 향후 10년을 생각해 보기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글 읽기에 참 편하네요.
감사합니다.
@포동28
오 중국회사에서 개발 리드시는 건가요? 클라우드 관련해서 중국이 요즘 한참 열올리던데요. ㅎㅎ 꼭 성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블로그 잘 보고 있습니다.
저랑 동문 이시네요 ㅎㅎㅎ 반가운 마음에 인사 남기고 갑니다.
반갑습니다..선배님 이신가요 😀
안녕하세요? 우연히 블로그를 다니다가 봤습니다.
이름이 아무래도 눈에 익어서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예전에 Grid 할때 관련자들 명단에서 봤었나보네요.ㅋ
반가워서 글 남깁니다.
아 그러고보니 저도 병호님 이름이 눈에 익네요. 예전에 그리드 할때 어디선가 정말 뵜을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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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백: 장관님, 이런 놈들을 찾으십니까? | Human-Computer Symbiosis
“C언어 수업 결국 C를 받았다.” ^^
C언어에서 A받은 사람은 ㅋㅋ 웃으며 소비자로 등록중입니다.^^
미래의 영웅이 되시던지(SW의 박찬호, 김연아^^), 영웅을 운반하는 뱃사공(그들을 가르친 스승)이 되시던지 하셨으면…
미래의 영웅이 되고는 싶지만 왠지 힘들것 같네요..ㅎㅎ 열심히 해서 뱃사공이라도 좀 해봤으면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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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선배님 말씀이셔서 엄청 와닿았습니다. 저도 자교 석사 후 해외 대학원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애매한 마음은 품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글을 만나서 너무 좋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정확히 15년전에 품었던 생각이예요. “석사 마치고 유학 가야지!”.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이루어 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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