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블로그를 안해서 그런지 손가락이 찌뿌드드하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동안 관찰한 인류의 한가지 패턴중 하나인 너드(Nerd)를 떠올렸다. 한국에도 너드 인종이 분명 존재하지만, 여기 미국의 너드 인종은 사회가 자유로워서 그런지 마음껏 DNA에 새겨진 너드 향기를 풍기며 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너드향에 취해 나 또한 너드가 되어 가는것을 발견한다. 완전히 너드인으로 감염되기 전에 어서 나의 발견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어 키보드를 두들긴다.
우선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 너드 (Nerd)의 사전적 정의를 한번 먼저 살펴보자 (http://dictionary.reference.com/browse/nerd).
- 멍청하고, 쓸모없고, 매력없는 사람
- 똑똑하지만 비 사회적인 취미나 이상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
멍청한 사람도 너드고 똑똑한 사람도 너드라니 재밌다. 미묘하게 두 반의어 사이를 오가는 인종을 너드인이라고 해야 할까? 참고로 유사어로는 Geek 정도가 있고, 한국에서 서식하는 너드는 흔히 오탁후, 잉여인등의 명칭으로 불린다. 그럼 본격적으로 너드의 코드를 분석해 보자.
1. 너드의 드레스 코드 (Nerd’s dress code)
너드라면 패션센스 없는게 상식이다. 나는 한국에 갈때마다 한가지 스트레스를 받는데, 나름 집에서 제일 깨끗한 옷으로 잘 차려입고가 비행기에서 내리면, 부모님, 특히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신다. 미국에서 거지온줄 알았다고…하루, 이틀 여행가방에 넣어온 옷들 — 주로 검은 티셔츠와 갭 반바지 — 을 입고 돌아다니면, 결국 이웃들 보기 부끄러우신지 내 손을 이끌고 메이커 옷가게로 향하신다. 몸에 착 달라붙는 그 옷들을 한국에서만 간신히 입어 드리다가 미국에서는 옷장에 쳐박고 다시 나만의 드레스코드로 돌아간다. 그럼 너드의 드레스 코드, 그 기준은 무엇인가? 개콘의 애정남 프로가 유행인데 최효종처럼 그럼 나도 이 자리에서 애매한 그 기준을 정확히 정해드리겠다.
- C급 너드: 면바지 + 카라 있는 옷 (폴로 티셔츠나 남방)
- B급 너드: 청바지 + 카라 없는 티셔츠
- A급 너드: 청바지/반바지 + 공짜 티셔츠 (주로 컨퍼런스에서 주는 홍보 티) + 샌달
- 일진 너드: 반바지 + 공짜 티셔츠 + 샌달 + 양말 (흰색이 갑)
여기에 예외는 없다. 내가 수년간 관찰한 결과이기도 하고 리누스 토발즈가 그의 책 (Just for fun)에서 밝히기도 한 그의 드레스 코드다.
오른쪽 사진은 두달전쯤 우리 회사에 놀러온 제임스 고슬링 옹이시다(고 밑에는 본인).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분은 반바지, 공짜 티셔츠, 샌달에 양말을 정확히 착용하고 계셨다. 우리 회사에선 마케팅 차원에서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가장 싼(!) 티셔츠를 선물했고, 티셔츠의 로고를 약 10초간 흐뭇하게 바라보며 좋다고 하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우리 회사의 개발팀 막내는 작년 막 대학을 졸업한 ‘개럿’이라는 녀석이다. 이 친구가 저 멀리 미네소타주에서 인터뷰 하러 온날, 나와 동료들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결론을 내렸다: “대박이다. 뽑자!”. 두뺨을 살포시 덮는 꼬불꼬불한 금발, 여드름끼가 가시지 않은 희고 큰 얼굴에 두툼한 안경을 낀 그 녀석의 호기심 가득한 얼굴은 동화속에서 막 뛰어 나온것 같은 너드나라 어린왕자였다. 깔끔해 보이려고 입은 흰 남방을 힘겨워 하는 그를 보며 , 면접을 위해 엄마가 정성껏 골라준 옷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직감했다. 그의 패션센스는 반바지에 매달고 다니는 알루미늄 물통에서 절정을 이룬다. 회사에 들어온후 우리의 예상대로 그는 실력에서도 일진이었다. 개발팀에서 가장 어리고, 팀 절반은 박사들이지만 그의 패키징 지식은 팀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다. 개럿은 Fedora 커뮤니티에서 존경받는 개발자중 하나다.
2. 너드의 생활 코드 (Nerd’s social code)
너드들과 어울려 생활하다 보면 묘하게 발견되는 대화와 인간관계, 그리고 취미의 공통점이 있다. 오늘은 특이한 두가지만 소개해 본다.
– 마음 여린 독설가
경험상 성격이 유순하고 두루 두루 사람들과 잘지내는 사람가운데 뛰어난 프로그래머는 드물다. 뛰어나고 감각적인 코더들은 종종 성격이 지랄 맞거나, 아니면 대화의 기술이 부족해서 표현이 아주 직설적이다. 이를테면 우리 회사의 개발회의는 종종 이런식의 대화가 오간다.
CTO ‘리치’ (약 50세, 사진속 고슬링과 대화) – “얘들아 우리 경쟁회사 애들이 A라는 기능을 새로 추가했단다. 우리도 그 기능을 만들어볼까?”
나 (순한 32세) – “오 좋은 아이디어. 나도 그런거 생각했어요 (일종의 아첨…).”
개발자 ‘닐’ (31세) – “오 쒯, 왓 더 뻥! 코딩도 제대로 못하는 잡놈들이 만든걸 따라하라고?”
회의중에 “쒯” “왓 더 뻥” 이런 상스런 표현은 아주 흔하게 접한다 (뻥유 까지는 안한다). 회사에 ‘닐’ 이라는 이름의 31살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욕쟁이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까만 구레나룻이 나서 좀 무섭게 생겼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도 근육질인데 이 친구는 회의할때면 종종 흥분해서 욕을 내뱉는다. 개발팀엔 50대 아저씨들도 있고 CTO는 예전 지도교수인데도 욕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사실 표현이 거칠어서 그렇지 대부분 맞는 이야기를 한다. 약간은 어색한 가운데 회의가 끝나면 ‘닐’은 이런 사진을 모두에게 보내곤 한다.
그렇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에 욕을 달고 살아도 마음만은 고양이 사진을 좋아하는 여린 청년인 것이다!
대부분 너드들은 마음이 여리고 착하다. 뛰어난 화술과 감정을 숨길줄 아는 사회 생활 스킬은 부족해도, 그래서 종종 친구들이 없고 외로워 보여도, 내가 만난 진짜 너드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소프트웨어 회사의 진정한 힘은 MBA 출신에 서글서글 사교성 좋은 사람들보다, 이렇게 거칠지만 마음 여린 개발팀 너드들이다.
– 잉여 폭발
지금까지 여러번 강조했지만, 폭발하는 잉여력은 너드들의 특징중 하나다. 회사에서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너드들은 종종 밤을 세우고 심혈을 기울여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내곤 한다. 그리고 그 작품에 다들 감탄하지만, 누구나 곧 이 의문을 갖게 된다. “근데 왜 했지?” — 예를 들어 ‘앤드류’라고 주말에도 회사에서 사는 젊은 너드가 최근 액셀 파일을 하나 만들었는데, 실시간으로 회사의 서버 정보들을 취합하는 매크로를 사용해 대단한 그래프를 선보였다. 내가 보기에 너무 멋졌다. 근데 왜 한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그 기능을 하는 웹페이지가 있었는데…
종종 이런 잉여력은 취미 생활로 나타난다. 우리 회사엔 자전거에 미친 사람이 많은데, 매일 나가서 20 km 정도를 달리고 온다. 보기 좀 민망하게 어떤 부위에 착 달라붙는 자전거복을 입고 복도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보면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생각이 절로 난다. 회사의 한국인 교포 친구는 써핑을 좋아해서 매일 아침 써핑하고 1시에 출근한다. 밤늦게까지 일하며 자기 몫은 잘 해낸다. 코딩을 하다보면 종종 기타소리가 들리는데, 자기 방에서 갑자기 미친듯 기타를 치는 대니얼과 그의 전 지도교수 리치다. 한때 골프에 미친 나는 1년동안 매일 아침 라운딩을 돌고 출근했다.
3. 너드의 인생 코드 (Nerd’s life code)
너드의 인생은 호기심으로 충만하다. 재미있는 장난감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고, 새로나온기계에 흥분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회사 사무실엔 장난감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모형 기차가 비좁은 개발실 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돌아간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엔지니어 아저씨 ‘데이빗’은 어느날 흥분하며 로봇 프로그래밍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회사의 비지니스와 관련도 없는데). 그의 입사를 환영하는 회식은 비좁은 사무실에서 시켜먹은 인도 카레와, 그가 들고온 X-box 게임이 전부였다.
잉여짓과 같은 작은 비전도,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큰 비전도 너드의 세상가운데 피어난다. 너드는 자신이 꿈꾸는 비전을 향해 코딩을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그 열망은 강해지는듯 하다. 우리 개발팀 최고 노장 아저씨 ‘밋치’는 아마 나이로는 50을 넘겼을거다. 하지만 우리 개발팀중에 그가 제일 유명하고 실력도 최고다. 구글을 포함 수만명이 그가 만든 아마존 웹서비스 클라이언트 라이브러리를 사용한다. 아저씨는 낮에는 회사일로, 밤과 주말에는 사람들이 보내온 패치를 적용하고 코딩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회사의 창업자이자 CTO인 ‘리치’역시 비슷한 연배의 대학 정교수다. ‘리치’는 개발팀 사람들 중 매일 아침 가장 일찍 출근해 코딩한다. 노트북 스크린을 뚫어버릴듯이 집중하며 키보드를 두들겨대다가, 밝게 웃으며 느즈막이 출근하는 우리들을 맞는다. CTO 역할은 좀 더 높은 자리에서 회사의 비전과 경영을 논해야 하건만, 그는 여전히 버그를 잡으려 GDB를 돌리고 시스템을 테스트할 스크립트 짜기에 여념이 없다. 출장길 공항에서도 그는 SSH로 접속해 시스템을 점검한다.
“너드: 똑똑하지만 비 사회적인 취미나 이상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 — 그 이상이 세상을 바꾼다.
4. 마무리
의문이 든다. 나는 진짜 너드일까?
패션감각은 제로니까 OK. 지금쓰는 블로그를 포함해 종종 잉여짓을 하니까 그것도 OK.
그런데 내가 프로그래밍하게끔 하는 힘은 정말 호기심과 비전일까?
두 딸과 아내의 생계를 위해 내가 희생한다고 생각했던적이 얼마나 많았는데…
박사학위를 받으면 코딩하지 않아도, 고상한 논문에 남들을 지도하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거라 생각한적도 있었는데…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아니면 도태될까봐, 그 “공포”에 질려 기술책들을 읽어가던 그런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그런데 50세가 넘어서도 코딩하는 나의 모습을 나는 정말 바라고 있었던 걸까? ….
아무쪼록, 훗날 내 아이들의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내가 만든 시스템을 보여줄 그런 날을 맞게되길 소망해본다.